2011년 1월 6일 목요일

배우 하지원

2000년 <진실게임>으로 영화배우가 된 후 그녀의 10년을 돌이켜 보면, 정말 숨가쁘다. 지난 10년, 그 어떤 여배우도, 아니 남자 배우까지 포함해도, 하지원만큼 '에너자이저 모드'로 달린 배우는 없다. 열정과 성실함을 무기로 도약과 착지를 반복해온 배우, 하지원. <내 사랑 내 곁에>는 벌써 그녀의 열네 번째(카메오 출연까지 합하면 열일곱 번째) 영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주연을 맡은 7편의 TV 드라마가 있었다.

글 l 신민경(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  오한기       구성 |  네이버영화
<내 사랑 내 곁에>의 하지원, 에너자이저처럼 달려온 지난 10년
비유에 일가견이 있는 한 후배가 하지원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림 반찬의 무 같은 배우." 처음엔 피식 하고 웃어넘겼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적확한 표현이다. 하지원은 향신료처럼 톡 쏘는 강렬함을 남기기보다, 레시피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배우에 더 가깝다. 최근작 <내 사랑 내 곁에>(2009)는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레시피가 하나 더 늘어났음을 증명했다.


감정의 표현, 더 넓어졌고 더 깊어졌다
영화 <해운대>(좌)와 <내 사랑 내 곁에>
'천만 관객 영화' <해운대>(2009)가 육체적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영화였다면, <내 사랑 내 곁에> 현장은 정신적 고생이 극심했다. 하지원은 2009년 한 해 동안,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물리적, 감성적 영역을 모두 펼쳐 보인 셈이다. <해운대>가 대박의 기쁨에 들떠 있을 동안, 하지원은 내내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 가슴을 앓았다.

장례지도사 지수(하지원)와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남자 종우(김명민)의 사랑 이야기 <내 사랑 내 곁에>. 픽션이라기보다 TV 다큐인 <병원 24시>에 가까울 정도로 리얼함을 강조하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하지원은 "감정이 점점 고조되어 나중에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이 왔다"고 토로한다. "겁 없이 덜컥 맡아버린" 지수라는 캐릭터는 그만큼 오래도록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지금까지도.

박진표 감독의 전작들이 그랬듯, <내 사랑 내 곁에>는 배우들에 기대는 부분이 상당한 영화다. 지수와 종우의 만남에서 종우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99퍼센트 하지원과 김명민의 몫인 것이다. 엄청난 체중 감량의 투혼을 보여준 김명민의 연기력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지만,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감정의 흐름을 주도하는 하지원도 놀랍다.

장례지도사란 직업상, 지수에게 죽음은 익숙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은 없다. 이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하지원은 때론 담담하게 때론 처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확실히 슬픔을 표현하는 스타일이 더 넓어졌고, 더 깊어졌다.

모범답안 같아서 조금 싱겁게 들리겠지만, 하지원이 캐릭터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뿐이다. "카메라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자"는 것. "열심히 울고 열심히 웃고 열심히 사랑하자"는 것. 상대 배역을 실제로 사랑하려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가 편견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예전에 어떤 영화에 캐스팅되었을 때 주변에서 상대 배우에 대해 '그 사람 이렇대'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냥 흘려 들었어요.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그 사람만 볼 뿐이에요. 저는 현장에서 같이 얘기하면서 작업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그 사람이 내게 감정을 던져주면, 나도 거기에 푹 빠져서 한없이 던져주고. 그런데 내가 그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서로 전율을 주고받겠어요?"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들
영화평론가 김봉석은 <형사 Duelist>(2005)가 개봉할 즈음 <씨네21>에서 "하지원에게는 중의적인 매력이 있다. 친근하고 귀여우면서 청순가련하기도 하고, 가끔 섹시하기도 하다. 대중은 하지원에게서 그런 모순된 매력을 느낀다. 반면 어느 하나로만 간다면, 하지원 자신도 관객도 지쳐버린다. … 하지원의 여러 이미지 중에서, 어느 하나만 빼낸다면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가 된다"는 분석을 했다. 그의 말대로 하지원은 <내 사랑 싸가지>(2004) <신부수업>(2004) <키다리 아저씨>(2005) 등 평면적인 캐릭터들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없이 발랄하거나 한없이 청순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는, 사실 충무로에 얼마든지 있다. 모든 배우가 그렇겠지만, 하지원은 어떤 캐릭터가 주어졌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하지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대부분 '생활의 무게'가 수반되었을 때다. 가난하거나 박복하거나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캐릭터들. 그 틈에서 하지원은 통속적인 욕망을 드러내거나 직접 몸으로 부딪혀 운명과 마주했다.

가깝게는 <해운대>(2009)의 억척스런 부산 처녀 '연희'나 <1번가의 기적>(2007)의 달동네 복서 '명란'이 그랬고, 멀게는 대중적인 입지를 가져다준 드라마 <다모>(2003, MBC)의 '채옥'이 그랬다. 하지원의 여성성이 극대화된 드라마 <황진이>(2006, KBS)에서조차,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중에서 <발리에서 생긴 일>(2004, SBS)의 '수정'은 하지원이 지닌 복합적인 이미지가 가장 큰 시너지를 낸 캐릭터다. 한없이 세속적이며 사랑과 욕망에 충실한 여자, 그러다 끝내 파멸에 이른 여자. 이렇듯 하지원에게는 한 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무규칙의 매력이 있다. '멜로 퀸' '호러 퀸' 같은 정형화된 타이틀은 하지원을 전부 설명해주지 못한다.

또래 배우들과는 다르게, 하지원은 어두운 이미지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학교 2>(99, KBS)에서 분노의 눈빛을 하고 있던 학교 '짱' 세진을 비롯해 데뷔작인 스릴러 <진실게임>(2000)과 두 편의 공포영화 <가위>(2000)와 <>(2002)까지. 이후 하지원은 <색즉시공>(2002)에서 가볍고 섹시한 이미지로 탈바꿈하더니, 몇몇 로맨틱 코미디로 노선을 갈아탔다. 그러던 중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는 하지원에게 큰 자극이 됐다. 영역을 넓히는 작업에서 깊게 파고드는 작업으로. 아니 그보다는 연기의 접근법을 완전히 뒤집게 해준 작품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하지, 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감독님이 시키니까 반항하지 않고 다 했어요.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발차기를 천 번쯤 한 것 같은데 영화에는 무식한 발차기 딱 한 컷 나오고.(웃음) 칼싸움 장면을 찍는데 왜 탱고를 연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만큼 접근하는 방법이 굉장히 달랐는데, 그런 작업들이 참 재미있었어요."

좌측부터 영화 <폰>, <색즉시공>, <형사>
칼싸움 장면을 찍으면서 격렬한 베드 신을 상상하라는 주문은, 분명 이제껏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만큼 이명세 감독은 알쏭달쏭한 주문으로 하지원을 괴롭혔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하지원은 몸으로 말하고 연기하는 법을 터득했다. 주어진 설정에 갇히지 말 것, 오케이 사인이 날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 이때 익힌 습관은 지금까지도 하지원에게 배어 있고, 그 어떤 연기 참고서보다 훌륭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배우 하지원'과 함께 '인간 하지원'도 성장한다
10년 이상 활동해 왔지만, 사실 하지원이란 이름은 대중들에게 큰 사건은 아니었다. 이른바 '폐인'을 양산한 작품도 여럿 있었고, 흥행 재미를 쏠쏠하게 본 작품들도 있었지만, 하지원은 그저 작품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뚜렷한 슬럼프나 스캔들이 없었기 때문에 "벌써 10년이 넘었나"라며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돌아보면 하지원은 눈부신 도약보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가는 배우에 가까웠다.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 같진 않은데, 돌아보면 이미 한 계단을 넘어선 배우.

하지원을 만나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가 착하고 예의바르고 단정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촬영장에서 흘러나오는 소문들은, 그녀가 굉장한 열정과 체력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했다. 때문에 "독하다" "재미없다" "일밖에 모른다"는 평가도 꼬리표처럼 뒤따랐다. 그동안 하지원이 '배우 하지원'에게 애정을 쏟은 나머지 '인간 하지원'을 돌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성공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 연기에 대한 단순한 열정이 작용한 까닭이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속 삶을 사는 게 미치도록 좋아서, 나 자신에게 인색했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아요. 그저 또 다른 나로 살아보는 게 행복했을 뿐인데, 지금은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내 사랑 내 곁에>를 하면서 '나 하지원은 누굴까?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정신적으로 요만큼 성숙하게 해준 거죠."

데뷔작 <진실게임>을 찍을 때 안성기의 모든 행동을 따라한 어린 배우. 아무것도 몰라 안성기가 밥 먹는 모습이나 대본을 쥐는 모습, 스태프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알게 모르게 따라했다는 배우 하지원. <진실게임>은 하지원에게 단지 대종상 신인상 트로피를 가져다준 작품만은 아니다. 첫 작품부터 운 좋게 국민 배우의 인품을 배우게 해주고, 그 겸허한 자세를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철부지 시절에 촬영한 데뷔작 <진실게임> 이후 10년. 필모그래피가 하나 둘씩 추가되면서, 배우 하지원과 인간 하지원은 조금씩 성장했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를 품게 되기까지는, 또 다른 10년 아니 20년이 더 걸릴 것이다. 하지만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 하지원이라면, 그 시간은 충분히 앞당겨질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말미, 조금 진부한 질문을 던졌다. "아주 먼 훗날, 누군가 하지원에 대한 추모 기사를 쓴다면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하지원은 쑥스럽다는 듯 한참이나 웃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봐서.(웃음)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배우? 하하하. 사실 저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하는 편이에요. 일할 때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때문에, 설사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항상 열정은 가지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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